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슐리펜 계획 (문단 편집) === 오스트리아와의 불통 === 러시아와 프랑스가 더욱 가까워지고 동원 가능 시간이 갈수록 촉박해짐에 따라,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사적 공조 필요성은 나날이 증대되었다. 우선 [[독일 제국군]]으로서는 빡빡한 슐리펜 계획의 성공을 위해서는 동맹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이 동부전선에서 러시아군의 전력을 늦춰주어야 했다. 오스트리아군 역시, 그들이 세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s-3.3.5|B, R, B+R계획]] 중 어떤 것이든 세계 2위의 육군을 보유한 [[러시아 제국군]]을 대비하기 위해서는 독일군이 폴란드 방면에서 러시아를 반드시 견제해주어야 했다. 이렇듯 양 군대는 서로를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순위 자체가 달랐다.''' 독일은 우선 가장 위협적인 적인 프랑스를 목표로 했으므로 동부전선의 러시아군은 독일 1개 군과 오스트리아군이 전담해야 했다. 반면 남부의 세르비아, 그리고 동북부의 러시아에 포위된 형국이었던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는 독일군의 주력이 프랑스가 아니라 폴란드 돌출부에 포진한 러시아를 상대해 주어야 했다. 때문에 [[소 몰트케]]와 [[프란츠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회첸도르프]]의 참모부 간에는 합동 작전을 위한 의견 조율을 통해 양 군의 목표를 일치시키는 과정을 가지거나, 하다못해 서로의 계획이 어떤지라도 알아야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소통은 전혀 없었다. 두 군대의 참모부는 서로의 계획에 대해 몰랐으며, 서로가 자신의 계획에 맞춰 움직이기를 당연하다는 듯이 가정하였을 뿐이었다. [[7월 위기]]가 시작되자 오스트리아는 독일에 지원을 요청하고 독일 황제와 참모부 역시 이에 화답하였으나, '''실제 각국의 전략목표나 병력 운용에 대한 정보 공유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불통에 대해 사학자 A.J.P 테일러는 저서 "기차 시간표 전쟁"에서 '''놀라울 정도'''라고 표현했다. 현대 [[독일 연방군]] 군사사연구소의 연구원인 게하르트 그로스 대령 역시 저서 "독일군의 신화와 진실"에서 같은 평가를 내렸다. 결국 전쟁이 발발하자 독일의 지원 의사를 믿은 오스트리아군은 자신들의 B 계획에 따라 황태자 암살단을 도운 [[세르비아 왕국|세르비아]]를 응징하러 발칸 반도로 몰려가버렸으나, 막상 독일군이 자신들의 작계에 따라 프랑스를 향해 진격하는 것에 경악했다. 마찬가지로 오스트리아의 계획을 알지 못했던 독일군은, 적인 러시아군이 예상 외로 동원계획을 빠르게 마무리짓는 반면 아군의 방어선은 그다지 강화되지 않은 모습에 당황했다. 위기감을 느낀 오스트리아는 곧 계획을 B+R계획으로 전환하였으나 이로 인해 [[발칸 반도]]의 전황은 완전한 교착 상태에 빠지게 된다. 급작스러운 계획 변동으로 인해 분과 초를 다투는 철도 시간표와 동원 계획이 어긋난 것이다. 그 결과 작계가 꼬이며 [[세르비아 침공]]을 증원할 예비대인 A집단군이 갈리치아로 가버린 오스트리아의 발칸 최소집단군은 결사항전의 의지로 무장한 채 산과 강을 따라 방어선을 세운 [[세르비아군]]을 밀어내지 못했다. 반면 갈리치아에 전개되었던 B집단군과 발칸으로 향하다 다시 뒤돌아 갈리치아로 올라간 A집단군은 빠르게 동원을 완료한 러시아군의 전열 앞으로 축차투입되어 처절하게 박살났다. 마찬가지로 독일 역시 1개 군단을 서부에서 빼내어 동부전선으로 보내야만 했으며 이는 슐리펜 계획의 세밀한 운용계획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독일이 해당 군단을 서부전선에서 빼내지 않았어도 슐리펜 계획은 실패했으리라는 것이 중론이지만, 이들을 빼낸 것 때문에 서부전선의 독일 전력이 상대적으로 확연하게 약해졌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